주말 동안 즐기는 서울의 레트로 여름 #서울재발견
더욱, 오래가게 - 토요일
찍은 후에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필름카메라가 가진 기록의 의미. 쉽게 고칠 수 없는, 순간의 모습 그대로가 남아 있기에 더 마음을 빼앗기는 풍경. 시간을 간직한 오래된 서울의 가게들을 담기에 딱 잘 어울린다. 청량한 여름을 설명하기에도 이만한 게 없다.
종로구에서 나고 자랐다. 어떤 가게는 그 모습 그대로, 또 어떤 가게는 자리를 옮겼거나 리모델링을 거쳐 새롭게 단장했다. 사라지는 가게들도 있다. ‘가게’. 사전적 의미로 보면 작은 규모로 물건을 파는 ‘집’인데, 물건들의 집이며 또 새로운 주인을 만나는 임시 거처인 곳. 멀리서 보면 그대로인 것 같은데 가까이 들여다보면 바뀌어 가는 모습이 어쩐지 아쉽고 또 정겨워 하나하나 기억해두고 싶어진다. 뜨거운 여름날, 언제 바뀔지 모르는 것들의 순간을 담아두기 위해 필름 카메라를 들고 걸어본다.
북촌한옥마을의 언덕과 정독 도서관을 둘러보며 걷는다. 출출함을 달래줄 비원떡집의 투텁떡을 한입 물고 걷다보면 3층 건물의 아원공방이 보인다. 1983년부터 지금까지 거의 40년의 세월을 건너온 이 공방은 묵직한 금속 소재를 ‘선’으로 표현하는 간결함이 있다. 오래된 인사동의 1호점이 문을 닫아 아쉽지만 북촌 자락의 2호점 갤러리 아원은 조금 더 현대적인 모습으로 나이를 먹어간다.
가게에 들어서니 막히는 것 하나 없이 탁 트인 쇼윈도 너머로 작은 새들이 날아다닌다. 아원공방의 대표적인 오브제들로, 천장에 매달아 쓸 수 있는 촛대다. 2층은 갤러리로 사용한다. 하얀 벽을 따라 젊은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데, 거의 매달 다른 작가들의 다양한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금속공예 작품, 사진, 도자기, 페인팅 등 전시 주제도 항상 달라진다. 3층과 루프탑은 카페로도 운영한다.
더운 을지로 사이를 누비다 시원한 마실 것이 생각나는 순간엔 을지다방이다. 세계적인 아이돌 그룹 BTS의 사진 촬영지로 너무 유명해 져버린게 흠이라면 흠. 그래도 을지로 로컬피플이 사랑하는 단골 커피숍은 여전하다. 을지면옥과 을지다방은 오랫동안 둥지를 틀었던 자리를 내어주고 차례대로 자리를 옮겼다. 다행히도 입구부터 예전과 같은 바로 그 분위기다. 새롭게 문을 열었지만 마치 매일 봐온 사람을 만나듯 손님을 반긴다.
카페라는 이름보다 커피숍이 어울리는 가게. 자리에 앉아 냉커피를 주문한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도 아니고 아이스라테도 아닌 냉커피. 둘둘둘일까, 둘둘셋일까. 사장님은 레시피는 비밀이라고 하는데, 단골 손님에게도 언제나 똑같이 비밀이다. 적당히 달고 시원한 맛이 몸 구석구석 전해진다. 여름의 레모네이드도 딱 생각하는 그 맛이다. 쌍화차를 글로만 만나보았다면 먹는 방법을 듣고 천천히 맛을 즐겨보는 것도 추천. 소파에 몸을 기대면서 남아있는 주말에 무엇을 더 해볼까 고민한다.
수많은 빵집과 디저트 가게 중에서도 눈에 띄는 두툼한 콘크리트 건물의 외관. 맛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고집이 느껴지는 곳, 태극당. 가게에 들어서면 고소한 버터향과 달큰한 빵냄새가 온 몸을 감싼다. 투명한 봉투에 빨간 글씨가 써 있던 카스테라는 지금도 그대로다. 아니지, 지금은 그 맛의 특별함에 키치함까지 더해졌다. 천천히 빵을 골라본다. 빵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있지만 역시 단팥빵과 사라다빵은 필수. 흡, 숨을 한번 가득 들이 마시고 계산대 앞의 냉장고에서 모나카 아이스크림도 꺼낸다. 시원한 모나카를 한입 물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지하철역을 향한다. 필름이 조금 남았으니 한 정거장 정도는 일찍 내려 조금 더 걸어 볼까한다.
여름은 아직 종로에 남아 - 일요일
오늘도 온종일 뜨거운 여름의 종로에서 보낸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또 찾으며 곳곳을 혼자 걷는다. 한여름을 막 넘어선 서울, 그 생생한 리듬감이란!
오늘의 주제곡을 골라 플레이리스트에 담는다. 이어폰을 꽂고 풍경에 맞는 음악과 함께 골목을 걸으면 혼자만의 영화가 시작된다. 언제 어디서든 즐길 수 있는 스트리밍 음악 서비스 덕분에 더이상 수고로울 필요가 없다. 그런데도 자꾸 생각나는 번거롭지만 매력적인 LP. 필름카메라가 담아내는 레트로 여름 산책에는 역시 어쿠스틱 기타소리와 LP 선율이 어울리겠다.
종로의 높은 빌딩숲을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나즈막하고 오래된 상가들이 줄을 지어 서있다. 여름의 오후를 휘휘 저으며 걸으면 낙원악기상가가 보인다. 눈에 들어오는 간판마다 사연이 있어 보인다. 오래된 악기점이 보이고, 누군가의 방 한켠에 자리하고 있었을 법한 중고 LP들이 정리되어 있다. 여름은 아직도 한창이고 오래된 음악은 종로에 모여 흐르고 있었다.
어쿠스틱 기타의 울림을 가진 경은상사는 오랜시간 그 멋진 소리를 한국에 소개했다. 기타를 찾거나 튜닝을 받는 음악인들이 끊임없이 오가고, 구매를 강요받지 않고 그저 조용히 악기를 구경하는 사람들도 드나든다. 가객(歌客) 김광석의 흔적을 따라 들르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 기타의 울림이 경은상사에서 시작된 것이라 생각하니 가게의 낡은 의자 하나도 예쁘다.
종로3가역 근처에는 서울레코드가 있다. 1976년부터 이 자리를 지켰으니, 벌써 반백년이 되어 간다. 트로트 음반을 찾는 어르신부터 코가 닿을 듯 재즈 음반을 들여다 보는 젊은이까지, 음악을 찾는 사람들의 시간이 여기에 멈춰있다. 오래된 선풍기와 어울리는 카세트 테이프와 LP판들. 매장 가운데 있는 붉은색 전화박스는 타임머신이 상상이 된다. 신청곡과 사연을 남기면 다음 날 음악을 틀어주는 ‘내일의 신청곡' 우편함에 쪽지를 남겨본다. 오래된 추억의 앨범을 찾으며 미래의 나에게 남기는 메시지는 두근거리는 경험이 된다.
가게 밖 도로 건너편으로 종묘가 보인다. 긴 시간 동안 왕과 왕비들에게 제례를 올리고 있는 묵직하고 단아한 건축물이다. 이 더운 여름, 나무그늘도 거의 없는 종묘에 무슨 볼일이려나. 지금 마음을 끄는 것은 종묘의 서쪽 담벼락을 따라 한양의 치안을 챙기던 순라군들이 순찰을 돌던 순라길, 서순라길이다.
원래 종로는 오랜시간 보석의 세공을 도맡아 하던 가게들이 많았고 이 길도 작업 공방들의 짐을 실어 나르는 짐차들이 가득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예쁜 돌담길을 두고 볼 수 없어 안타까워 하던 이들에 의해 하나둘 작은 카페들이 생겨났다. 가원공방과 같이 전통기법으로 옥을 세공하는 가게들도 그대로 자리하는 곳에, 퓨전으로 새롭게 해석한 재밌고 맛있는 음식을 내어놓는 이다와 같은 레스토랑이 함께한다. 아이디어 반짝이는 주얼리 디자이너의 작품을 구경하고 구매할 수 있는 서울주얼리지원센터 스페이스42도 더운 여름 잠시 그늘과 볼거리를 내어준다.
여름의 열기는 시원한 팥빙수를 들이밀어도 쉬이 가라앉지 않는다. 창덕궁과 종묘가 이어져 있던 옛모습을 복원하기 위해 둘 사이를 연결하는 산책로가 완성되었다 하여 올라가보니 한여름의 태양은 아직 너무 뜨겁다. 서순라길과 닿아 있어 레트로를 즐기려는 이들에게 희소식이지만, 잠시 가을로 미뤄둔다. 선선한 바람에 다시 만나자.